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지음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지음
□ 요약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이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아니면 사랑은 우연히 경험하게 되는, 즉 행운만 있으면 ‘빠져들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작은 책에서는 사랑은 기술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 놓은 수많은 영화를 관람하고, 사랑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같은 특이한 태도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 전제들은 단독으로 또는 서로 결합해서 그 태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여기기보다는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남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성공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지위가 지니는 사회적인 한계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자신의 몸매를 가꾼다거나 옷치장을 하는 등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녀 모두 사용하는 방법은 유쾌한 태도, 흥미 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여러가지 방법은 결국 성공하기 위해 즉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과 비슷하다. 사실 우리 문화권 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기와 성적 매력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태도의 배경에 깔려 있는 두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은 쉬운 것이고, 오히려 사랑하거나 사랑 받을 올바른 대상을 찾는 일이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근대 사회의 발전에 근거를 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서 20세기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대부분의 전통 문화에서와 같이 사랑이란 곧 결혼으로 이어지는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은 관습에 의해서, 즉 양쪽 집안에 의해서, 혹은 중매인에 의해서, 또는 그러한 중개자의 도움 없이 이루어지는 계약이었다.
결혼은 사회적인 여건을 고려해서 이루어졌으며, 사랑은 결혼이 성립된 후에 생겨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서양에서 낭만적인 사랑이 라는 개념이 거의 보편화된 것은, 지난 수세기 동안의 일이었다. 미국의 경우, 전통적인 성격을 지닌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낭만적인 사랑’이 곧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 이렇듯이 사랑에 있어서 자유라는 새로운 개념은 ‘기능’의 중요성과는 반대로 ‘대상’의 중요성을 매우 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문화의 또 다른 특징적인 성격은 이러한 요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과 상호간의 균등한 교환이라는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대인의 행복은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는 전율과 현찰이든 할부이든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는 데 있다. 현대인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본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매력적인 여자, 여자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남자가 그들이 얻으려고 하는 상품이다.
‘매력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기있고, 인격의 시장에서 잘 팔리는 품질 좋은 성격 꾸러미를 의미한다. 특히 매력적이라는 기준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 시대의 유행에 달려 있다. 1920년대에는 강인하고 성적 매력있고, 술과 담배를 할 줄 아는 여성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유행은 좀더 가정적이고 얌전한 여자를 요구하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매력적인 남자의 조건이 공격적이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사교적이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쨌든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은, 자신과의 교환 가능성이 있는 인간 상품들과 관련지어서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물건을 사러 나갔다고 하자. 상대방은 사회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해야 하며 동시에 상대방이 나의 드러난 혹은 숨겨진 자산과 가능성을 고려하여 나를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두 사람이 자신들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여,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냈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세번째 오류는,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다’는 영속적인 상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 우리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서로 전혀 모르고 지냈던 두 사람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흥미 있는 경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특히 고립되어 사랑 없이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멋지고 기적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특히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주도되고 이와 결합될 때 더욱 촉진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사랑은 그 성격상 지속적이지 못하다. 두 사람이 점차 친숙해지면 그들의 친밀감이 지녔던 기적적인 성격은 서서히 잃게 되고, 마침내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실망감, 그리고 권태감으로 인해서 최초의 흥분은 흔적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심취, 즉 서로에게 ‘미쳐있다’는 것을 그들은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증거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는, 그렇지 않음을 타나내는 증거가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다. 사랑처럼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없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다른 활동이었다면,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배우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활동을 포기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삶이 하나의 기술이듯 사랑도 기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려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기술, 즉 음악이나 그림, 건축, 의학이나 공학의 기술을 배우고자할 때 시작하는 것과 똑 같은 과정을 밟아야만 할 것이다.
어떤 기술을 배우는 데 있어서 거쳐야 할 단계는 무엇인가?
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편의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이고, 둘째는 실천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만일 내가 의학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인체에 대한 지식과 여러 질병에 대한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러한 이론적 지식에 통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의학 기술에는 숙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내가 가진 이론적 지식과 실천의 결과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즉 그 두 가지가 모든 기술 습득의 원천인 직관으로 될 때까지 상당한 정도의 실천을 쌓은 후에라야 비로소 나는 의학에 있어서 대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익히는 것 외에도 어떤 기술에 있어서 대가가 되는 데는 또 한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즉 기술 습득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사랑뿐만 아니라 음악, 의학, 건축에도 해당된다.
우리 문화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실패하면서도 왜 이러한 기술을 배우려 들지 않는가에 대한 해답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그렇게 갈망하면서도 사랑보다는 성공, 권위, 돈, 권력 등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모든 정력을 사용하고 있다.
1. 사랑,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
인간은 이성을 부여받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자신, 동료, 자신의 과거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자신을 따로 떨어진 실재로 인식하고 자신의 생명이 매우 짧음을 알며,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고독과 분리, 자연과 사회의 힘 앞에서는 자신이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 등,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분리되고 분산된 존재를 참을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이 감옥에서 빠져 나와 자신을 타인이나 이부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 결합하지 않으면 곧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경험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확실히 그것은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을 사용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무력함을 의미하며 이 세계, 즉 사물과 인간을 능동적으로 파악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이 세계에 대해 반응하지 못한 채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근원이다. 그것을 넘어서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유발시킨다. 분리된 상태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즉 그들이 복종하지 않는 후에 자연과의 본래적인 동물적 조화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인간이 된 후, 즉 인간으로서 탄생한 후에, 자신들이 ‘벌거 벗고 있다’는 것과 ‘부끄럽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오래 된 단순한 신화도 19세기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시치미 떼는 도덕을 갖고 있고,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그들의 성기가 눈에 띄게 된 데서 오는 당혹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게 된다. 즉 남자와 여자가 다른 성에 속해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이 사랑에 의해서 다시 결합되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수치심의 원인인 동시에 죄책감과 불안의 근원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려는 욕구이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데 ‘결정적으로’ 실패한다면 곧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고립에 대한 공포감은 분리감이 사라져 버리도록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그 외부 세계마저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모든 인간은 한 가지의 동일한 문제의 해결에 직면해 왔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분리감을 극복하고 일치를 이루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 해답은 다양하다. 그 문제는 동물 숭배에 의해, 인간의 희생이나 군사적 정복에 의해, 사치에의 탐닉에 의해, 금욕적인 포기에 의해, 강제 노동에 의해, 예술적 창조에 의해,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에 의해 해답을 낼 수 있다.
이러한 해답들은 어느 정도는 개인이 도달한 개성화의 정도에 달려 있다. 유아기에는 ‘나’라는 개념이 발달되기는 하지만 아직도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유아는 여전히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며 어머니 옆에 있는 한 분리감을 느끼지 못한다. 유아의 고독감은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가슴, 피부의 접촉에 의해 치유된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분리감과 개성을 발달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어머니의 신체적 존재는 더 이상 충분한 치료 조건이 되지 못하며,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분리를 극복해야 할 욕구가 생긴다.
또한 인류도 유아기에는 자연과 일체감을 느낀다. 대지와 동물, 그리고 식물은 아직도 인간의 세계이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이것은동물의 머리 모양을 한 가면을 쓴다거나, 토템으로 삼고 있는 동물이나 동물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인류가 이런 원시적인 유대관계어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인류는 자신을 자연세계와 분리시키게 되고, 분리를 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가지 방법으로 ‘잔뜩 마시고 떠는 상태’가 있다. 이런 상태는 때로 마약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저절로 유발되는 활홀경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원시 부족들의 종교 의식의 대부분은 이러한 유형의 해결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황홀경으로 빠져드는 상태에서 외부 세계는 사라지게 되고 더불어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도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의식들은 공동으로 행해지므로 집단과의 융합이라는 경험이 강화되어 이 해결 방법을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이 같은 도취적 해결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그것과 혼합되는 것으로 성적인 경험이 있다. 성적인 극치감은 황홀경에 의해 유발되거나 어떤 마약의 효과로 생겨나는 것과 유사한 상태를 자아낸다. 집단으로 행해지는 성적인 의식은 이러한 원시적인 의식의 한 부분이었다. 황홀경을 경험한 후, 얼마간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통받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안에 대한 긴장은 점차 고조되며, 다시 그 의식을 되풀이해야만 감소되는 것이다.
황홀경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그 강도가 매우 강렬하여 때로는 난폭하다는 것이며, 둘째로 전인격에 걸쳐서, 즉 육체와 정신 모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며, 셋째는 일시적이며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가장 흔하게 선택되어지는 일치의 양식이다. 그것은 집단, 그 집단의 관습, 관행, 신념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상당한 발전을 볼 수 있다.
합일을 얻는 방법 중 하나는 ‘창조적인 활동’이다. 비록 그것이 예술가의 활동이든 숙련된 장인의 활동이든 어떤 종류의 창조적 활동이든 간에 창조적인 사람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나타내는 자료와 결합한다. 목수가 탁자를 만들든 금세공인이 보석을 다듬든 농부가 곡식을 재배하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든 간에,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인간은 창조과정에서 자신을 세계와 결합한다.
생산적인 작업에서 이루어진 합일은 인간 상호간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황홀경 속에서 이루어진 합일은 일시적이며 일치에 의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해답에 불과하다. 완전한 해답은 인간 상호간의 합일과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의 성취인 것이다.
‘공서적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와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둘이지만 하나이다. 어머니와 태아는 공서, 즉 함께 살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일부이고 필요한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서 받는다. 어머니는 태아의 세계인 것이다. 어머니는 태아를 먹이고 보호하지만 어머니 자신의 생명도 타아에 의해서 강화된다. ‘정신적’인 공서적 합일에 있어서의 두 신체는 독립적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애착이 존재한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인 유형은 복종, 또는 임상적인 용어로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며 보호해 주는 타인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기디 힘든 고독감과 분리감으로부터 도피한다. 인간의 복종하고 있는 사람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간에 팽창된다. 그는 모든 것이며 내가 그의 일부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 나는 위대성과 확실성의 일부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할 필요도, 위험을 무릅써야 할 필요도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다. 하지만 독립한 상태도 아니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하며 아직 완전히 탄생한 것도 아니다.
공서적 융합의 ‘능동적’인 형태는 지배 또는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하는 심리학적 용어로는 ‘가학성 음란증(사디즘, sadism)’이다. 가 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타인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고독감과 갇혀 있다는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에 의존하듯,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적인 사람에게 의존한다. 양자는 한쪽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차이점은 오직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하고 착취하며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하지만,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받고 착취당하며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의미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좀더 깊은 감정적인 차원에서 그 차이는 양자가 공유하는 것, 즉 통합성이 없는 융합만큼 그리 크지 않다. 만일 이 점을 이해한다면 일반적으로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방식과 피학대 음란증적 방식의 두 가지에 의해 서로 다른 대상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공서적 합일과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즉 인간이 타인과 분리되는 벽을 허물어 버리고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독감과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며 동시에 각자에게 자신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한편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세계와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것 외에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 없이 그냥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사람은 ‘수동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그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집중적 명상은 최고의 활동이며 내적 자유와 독립의 상황에서만 행할 수 있는 영혼의 활동이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능동적인 감정과 수동적인 감정, 즉 ‘행위’와 ‘열정’으로 구분한다. 능동적인 감정을 행사하는 인간은 자유롭고 자신의 감정을 지배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감정이 나타날 때 인간은 충동을 느끼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동기에 좌우되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덕과 힘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명제에 도달한다.
시기와 질투와 야망 등 모든 종류의 욕심은 열정이다. 하지만 사랑은 행위이며 오직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해질 수 있고 억압의 결과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인간의 힘의 행사이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인 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말로 표현 할 수 있다.
주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애매하고 복잡한 것이다. 가장 널리 퍼저 있는 잘못된 생각은, 주는 것이란 뭔가를 포기하는 것과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저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단계를 넘어설 만큼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준다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의 성격은 오직 받는 것에 대한 교환으로서만 주려고한다. 그에게 있어서 받지 않고 주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은 준다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주기를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규범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보다 박탈당하는 것을 참아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은 주는 것에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나는 나의 힘과 부와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는 것은 나를 환희로 가득 채워준다. 나는 자신을,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왜냐하면 주는 것은 박탈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서 나의 생동감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몇 가지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켜 보면 이 원리가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예를 성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남성의 성기능의 절정은 주는데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을, 자신의 성기를 준다. 극치감을 느끼는 순간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정액을 준다. 만일 그가 능력이 있다면 정액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줄 수 없다면 그는 성적 불능자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그 과정은 좀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리 다르진 않다. 여자 역시 자기 자신을 준다. 여자는 자기 중심을 향해 문을 연다. 여자는 받는 행위를 통해 주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이러한 주는 행위를 할 수 없고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주는 행위는 애인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기능에서 다시 나타난다. 어머니는 자신의 안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자신을 주며 유아에게 젖을 먹이고 체온을 준다. 주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주는 것은 곧 부유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 부자이다. 어떤 것을 잃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가 얼마나 많이 가졌든 간에 가난한 사람이며, 가난해진 사람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하다. 그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오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필수품마저도 상실한 사람만이 물질적인 것을 주는 행위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경험으로 보면 사람이 최소한의 필수품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가 실제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더 잘 주려고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일정한 수준을 넘어선 가난은 주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 가난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주는 기쁨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면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과 그가 지닌 것 중에 가장 귀중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준다. 물론 이 말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을 준다. 이것들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의 표현이며 명시이다. 따라서 그는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부유하게 하며, 자신의 생동감을 강화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강화한다.
그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기쁨이다. 하지만 주는 것을 통해서 그는 타인의 삶에 뭔가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렇게 가져온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진실로 주게 될 때 그는 그에게 되돌아 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는 것은 타인을 역시 주는 사람으로 만들며, 그들은 서로의 삶에 가져온 것을 함께 즐기게 된다. 주는 행위 속에서 뭔가 탄생하며 관계된 두 사람은 새로 태어난 생명에 감사하게 된다. 특히 이를 사랑과 관련지어 보면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무능력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사랑으로써만, 신뢰를 신뢰로써만 바꾸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술을 즐기려 한다면 예술적으로 훈련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타인에 대해 진실로 자극을 주고 발전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진실되고 개인적인 삶의 명확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즉 사랑을 낳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능력이요 불행을 의미한다.
책임은 사랑의 세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쉽게 지배와 소유로 전락할 수 있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경외는 아니다. 존경이란 어원과 관련지어 볼 때,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과 그의 독특한 개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존경은 타인이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며, 착취가 없는 상태이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와 일체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목적을 위한 대상으로서 필요로 하는 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감을 느낄 것이다. 존경은 내가 독립성을 획득한 경우에만, 즉 내가 꼿꼿이 서서 목발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 착취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그를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으면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유발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지식에도 많은 층이 있다. 사랑의 한 측면이 되는 지식은 주변에 머무르지 않고 중심을 꿰뚫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내가 나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을 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현실을 보기 위해서,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이나 비이성적으로 왜곡된 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야한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의 궁극적인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다. 이 네가지는 성숙한 인간, 즉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계발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갖고자 하며, 전지 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망상을 포기하고, 오직 생산적인 활동만이 제공할 수 있는 내적인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깨우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2.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유아적인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원칙에 따른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라는 원칙에 따른다. 미성숙한 사랑은 ‘나는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모성애는 그 성격상 무조건적이다. 어머니는 갓난아이가 어떤 특별한 조건을 채워 주어서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기대에 따라 성장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린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에 상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남게 되며,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항상 있다. 게다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상대방을 즐겁게 해 주었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결국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씁쓸한 감정을 흔히 남긴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모성애를 매우 동경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다르다. 어머니는 우리가 생겨난 고향이고 자연이며, 땅이요 바다이다. 반면에 아버지는 그러한 자연적인 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생후 몇 년간은 어린애와 거의 밀접한 관계가 없으며, 이 기간에 있어서 어린애에 대한 아버지의 중요성은 어머니와 비교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연적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더라도 인간 존재의 다른 극, 즉 사상과 인간이 만든 사물, 질서와 훈련, 여행과 모험의 세계를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이를 가르치고 아이에게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기능은 사회, 경제적 발달과 관련된 기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유 재산이 생겨나고, 그 사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게 될 때,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아들을 찾기 시작한다. 자연적으로 자신의 계승자가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상속자는 그를 가장 많이 닮고 결과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이 원칙은 ‘너는 내 기대를 충족시키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널 사랑한다’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생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하며, 지나치게 불안해서도 안 되고 어린이에게 자신의 불안을 심어 주어서도 안 된다. 어머니의 삶의 일부는 아이가 독립적이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희망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그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라기 보다는 인내심이 많고 관용적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라는 어린이에게 점증하는 능력감을 심어 주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권위가 되도록 아버지의 권위 없이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성인이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단계에까지 이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성숙한 인간은 어머니다운 양심과 아버지다운 양심을 지니고 있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떤 못된 행동이나 범죄도 나의 너에 대한 사랑과 네 인생의 행복을 바라는 내 소망을 빼앗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아버지다운 양심은 “너는 잘못햇다. 넌 네실수의 결과를 인정해야만 한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되길 바란다면 넌 네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성숙한 인간은 외부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며, 자기 내부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형성한 사람이다. 어머니 중심의 애착에서 아버지 중심의 애착으로 발달하는 과정속에, 그리고 양자가 궁극적인 종합을 이루는 과정 속에는 정신 건강의 바탕과 성숙의 성취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발달의 실패는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이 흐름의 사상을 좀더 깊이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간단히 몇 가지를 언급하면 그 말의 뜻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신경증이 생기는 한 가지 원인은 어떤 소년이 애정은 있지만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간섭하는 어머니와 약하고 무관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경우 그는 초기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머물러 있으며,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무기력하며 수용적인 인간, 즉 받기를 좋아하고 보호받고 보살핌을 받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버지다운 자질, 즉 훈련과 독립, 그리고 자신이 삶을 주도하는 능력이 결핍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 하는데 떄로는 여자에게서, 때로는 권위와 힘의 영역에 있는 남자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한다.
반면에 어머니가 냉정하고 무관심하거나 지나치게 간섭한다면 그는 어머니의 보호에 대한 욕구를 아버지에게, 결과적으로 아버지상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또한 그는 일방적으로 아버지 지향적인 인간, 즉 법과 질서, 그리고 권위의 원리에 충실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인간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러한 발달은 아버지가 권위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아들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강화된다.
3. 사랑의 대상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즉 ‘성격의 방향’이다. 만일 어떤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결국 사랑받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강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것과 똑같은 오류이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야 할 것은 올바른 대상이 전부이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이 그 기술은 배우지도 않고 단지 적당한 대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찾게 되면 멋지게 그리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에 비유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 이 세계를 사랑하고 나 자신까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 형제애
모든 유형의 사랑에 있어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사랑은 형제애이다. 형제애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감, 보호, 존경, 지식과 더불어 그의 삶을 심화시키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형태의 사랑이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서, 배타성이 전혀 없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진다. 만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켜 왔다면, 나는 내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형제애를 통해 모든 인간과의 결합과 인간적 유대의 경험이 가능해진다. 형제애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재능이나 지능, 지식의 차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인간적 내면의 동일성에 비하면 매우 하찮은 것이다.
2) 모성애
모성애는 어린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정의에 대해 중요한 것을 한가지 덧붙여야겠다. 어린이의 삶에 대한 긍정에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어린이의 생명 유지와 성장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호와 책임이며, 다른 하나는 단순한 보존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는,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것이 좋고 어린 소년 혹은 소녀라는 사실과 이 지상에 있다는 것이 좋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태도이다.
구약성서에서 약속된 땅(땅은 항상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젖은 모성애의 첫 번째 측면, 즉 보호와 긍정의 상징이다. 꿀은 생명의 달콤함, 생명에 대한 사랑과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젖을 줄 수 있지만, 오직 소수만이 꿀도 줄 수 있다. 꿀을 주기 위해서 어머니는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며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어린이에 대한 영향은 거의 과장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감염된다.
이 두가지 태도는 어린이의 전인격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사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젖’만 받은 사람과 ‘젖과 꿀’을 받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어린애는 자라게 마련이다. 어린애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어머니의 젖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결국 완전하게 분리된 인간 존재가 된다. 모성애의 주요 본질은 자라는 어린애를 보살핀다는 것이며, 그것은 어린애를 어머니에게서 분리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성애와 근본적 차이를 나타낸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사람이 하나가 된다. 모성애에서는 하나였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어머니는 참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분리를 도와 주어야 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 되며 비이기성, 즉 모든 것을 주고 사랑받는 아이의 행복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자아 도취적이며 지배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여자는 어린애가 어릴때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딜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진실로 사랑을 주는 여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보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확고시 서 있는 여자만이 분리의 과정을 밟고 있는 어린애에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3) 성애
모성애와 형제애 형태의 사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성애’인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융합, 즉 다른 한 사람과의 결합을 갈망하는 것이다. 친밀성은 기본적으로 성적인 접촉을 통해 형성된다. 사람들은 우선 물리적으로 분리된 것으로써 타인의 분리를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 결합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분리의 극복을 나타내는 다른 요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 자신의 희망 및 불안에 대해 말하는 것, 자신의 순진한 면 혹은 유치한 면을 보여주는 것, 세계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형성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신의 분노, 증오, 자제심의 완전한 결여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친밀함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변태적인 매력을 설명해 주는데, 그 부부는 잠자리에 같이 있거나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분노를 터뜨릴 때만 친밀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친밀감은 모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축소된다. 그 결과는 새로운 사람, 즉 새로운 낯선 사람과의 사랑을 찾는 것이다. 다시 낯선 사람이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흥겹고 강렬해지며, 다시 점차 그 강렬함이 누그러져 새로운 사랑은 이전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에 젖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는 희망으로 끝난다. 이러한 환상은 성욕의 기만적 성격에 의해 크게 조장된다.
성욕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 속에서 사랑이라는 생각과 짝을 짓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육체적으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사랑은 성적인 일치를 향한 욕구를 고양시킬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있어 육체적인 관계에는 탐욕과 정복하거나 정복당하고 싶은욕구는 존재하지 않고 부드러움이 결합되어 있다.
4) 자기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해는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진실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며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포함한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생겨나는 ‘감정’ 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한 사랑받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능동적으로 갈망하는 것이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하기는커녕 정반대 되는 거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매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자신을 증오한다.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호감과 보살핌의 부족은 그의 생산성 부족의 한 가지 표현에 불과하며 자신을 공허하고 좌절된 상태로 남겨둔다.
이기적인 사람은 타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그 사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처럼 자아 도취적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이기적인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다.
‘비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살며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하며, 자신의 비이기심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다는 사실을알고 의아해 한다. 분석적 연구를 보면 그의 비이기심은 그가 지닌 다른 증상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들 중의 하나이며 오히려 가장 중요한 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요약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이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아니면 사랑은 우연히 경험하게 되는, 즉 행운만 있으면 ‘빠져들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작은 책에서는 사랑은 기술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 놓은 수많은 영화를 관람하고, 사랑을 노래한 수많은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같은 특이한 태도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 전제들은 단독으로 또는 서로 결합해서 그 태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여기기보다는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남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성공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지위가 지니는 사회적인 한계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자신의 몸매를 가꾼다거나 옷치장을 하는 등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녀 모두 사용하는 방법은 유쾌한 태도, 흥미 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여러가지 방법은 결국 성공하기 위해 즉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과 비슷하다. 사실 우리 문화권 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기와 성적 매력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태도의 배경에 깔려 있는 두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은 쉬운 것이고, 오히려 사랑하거나 사랑 받을 올바른 대상을 찾는 일이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근대 사회의 발전에 근거를 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서 20세기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대부분의 전통 문화에서와 같이 사랑이란 곧 결혼으로 이어지는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은 관습에 의해서, 즉 양쪽 집안에 의해서, 혹은 중매인에 의해서, 또는 그러한 중개자의 도움 없이 이루어지는 계약이었다.
결혼은 사회적인 여건을 고려해서 이루어졌으며, 사랑은 결혼이 성립된 후에 생겨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서양에서 낭만적인 사랑이 라는 개념이 거의 보편화된 것은, 지난 수세기 동안의 일이었다. 미국의 경우, 전통적인 성격을 지닌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낭만적인 사랑’이 곧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 이렇듯이 사랑에 있어서 자유라는 새로운 개념은 ‘기능’의 중요성과는 반대로 ‘대상’의 중요성을 매우 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문화의 또 다른 특징적인 성격은 이러한 요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과 상호간의 균등한 교환이라는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대인의 행복은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는 전율과 현찰이든 할부이든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는 데 있다. 현대인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본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매력적인 여자, 여자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남자가 그들이 얻으려고 하는 상품이다.
‘매력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기있고, 인격의 시장에서 잘 팔리는 품질 좋은 성격 꾸러미를 의미한다. 특히 매력적이라는 기준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 시대의 유행에 달려 있다. 1920년대에는 강인하고 성적 매력있고, 술과 담배를 할 줄 아는 여성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유행은 좀더 가정적이고 얌전한 여자를 요구하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매력적인 남자의 조건이 공격적이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사교적이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쨌든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은, 자신과의 교환 가능성이 있는 인간 상품들과 관련지어서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물건을 사러 나갔다고 하자. 상대방은 사회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해야 하며 동시에 상대방이 나의 드러난 혹은 숨겨진 자산과 가능성을 고려하여 나를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두 사람이 자신들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여,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냈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세번째 오류는,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다’는 영속적인 상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 우리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서로 전혀 모르고 지냈던 두 사람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흥미 있는 경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특히 고립되어 사랑 없이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멋지고 기적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특히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주도되고 이와 결합될 때 더욱 촉진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사랑은 그 성격상 지속적이지 못하다. 두 사람이 점차 친숙해지면 그들의 친밀감이 지녔던 기적적인 성격은 서서히 잃게 되고, 마침내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실망감, 그리고 권태감으로 인해서 최초의 흥분은 흔적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심취, 즉 서로에게 ‘미쳐있다’는 것을 그들은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증거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 얼마나 고독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는, 그렇지 않음을 타나내는 증거가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다. 사랑처럼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없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다른 활동이었다면,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배우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활동을 포기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실패의 원인을 살펴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삶이 하나의 기술이듯 사랑도 기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려 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기술, 즉 음악이나 그림, 건축, 의학이나 공학의 기술을 배우고자할 때 시작하는 것과 똑 같은 과정을 밟아야만 할 것이다.
어떤 기술을 배우는 데 있어서 거쳐야 할 단계는 무엇인가?
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편의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이고, 둘째는 실천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만일 내가 의학 기술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인체에 대한 지식과 여러 질병에 대한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러한 이론적 지식에 통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의학 기술에는 숙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내가 가진 이론적 지식과 실천의 결과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즉 그 두 가지가 모든 기술 습득의 원천인 직관으로 될 때까지 상당한 정도의 실천을 쌓은 후에라야 비로소 나는 의학에 있어서 대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익히는 것 외에도 어떤 기술에 있어서 대가가 되는 데는 또 한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즉 기술 습득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사랑뿐만 아니라 음악, 의학, 건축에도 해당된다.
우리 문화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실패하면서도 왜 이러한 기술을 배우려 들지 않는가에 대한 해답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그렇게 갈망하면서도 사랑보다는 성공, 권위, 돈, 권력 등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모든 정력을 사용하고 있다.
1. 사랑,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
인간은 이성을 부여받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생명체’이다. 인간은 자신, 동료, 자신의 과거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자신을 따로 떨어진 실재로 인식하고 자신의 생명이 매우 짧음을 알며,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고독과 분리, 자연과 사회의 힘 앞에서는 자신이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 등,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분리되고 분산된 존재를 참을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이 감옥에서 빠져 나와 자신을 타인이나 이부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 결합하지 않으면 곧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경험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확실히 그것은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을 사용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무력함을 의미하며 이 세계, 즉 사물과 인간을 능동적으로 파악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이 세계에 대해 반응하지 못한 채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근원이다. 그것을 넘어서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유발시킨다. 분리된 상태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즉 그들이 복종하지 않는 후에 자연과의 본래적인 동물적 조화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인간이 된 후, 즉 인간으로서 탄생한 후에, 자신들이 ‘벌거 벗고 있다’는 것과 ‘부끄럽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오래 된 단순한 신화도 19세기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시치미 떼는 도덕을 갖고 있고,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그들의 성기가 눈에 띄게 된 데서 오는 당혹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게 된다. 즉 남자와 여자가 다른 성에 속해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이 사랑에 의해서 다시 결합되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수치심의 원인인 동시에 죄책감과 불안의 근원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려는 욕구이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데 ‘결정적으로’ 실패한다면 곧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고립에 대한 공포감은 분리감이 사라져 버리도록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그 외부 세계마저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모든 인간은 한 가지의 동일한 문제의 해결에 직면해 왔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분리감을 극복하고 일치를 이루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 해답은 다양하다. 그 문제는 동물 숭배에 의해, 인간의 희생이나 군사적 정복에 의해, 사치에의 탐닉에 의해, 금욕적인 포기에 의해, 강제 노동에 의해, 예술적 창조에 의해,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에 의해 해답을 낼 수 있다.
이러한 해답들은 어느 정도는 개인이 도달한 개성화의 정도에 달려 있다. 유아기에는 ‘나’라는 개념이 발달되기는 하지만 아직도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유아는 여전히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며 어머니 옆에 있는 한 분리감을 느끼지 못한다. 유아의 고독감은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가슴, 피부의 접촉에 의해 치유된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분리감과 개성을 발달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어머니의 신체적 존재는 더 이상 충분한 치료 조건이 되지 못하며,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분리를 극복해야 할 욕구가 생긴다.
또한 인류도 유아기에는 자연과 일체감을 느낀다. 대지와 동물, 그리고 식물은 아직도 인간의 세계이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이것은동물의 머리 모양을 한 가면을 쓴다거나, 토템으로 삼고 있는 동물이나 동물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인류가 이런 원시적인 유대관계어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인류는 자신을 자연세계와 분리시키게 되고, 분리를 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가지 방법으로 ‘잔뜩 마시고 떠는 상태’가 있다. 이런 상태는 때로 마약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저절로 유발되는 활홀경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원시 부족들의 종교 의식의 대부분은 이러한 유형의 해결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황홀경으로 빠져드는 상태에서 외부 세계는 사라지게 되고 더불어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도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의식들은 공동으로 행해지므로 집단과의 융합이라는 경험이 강화되어 이 해결 방법을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이 같은 도취적 해결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그것과 혼합되는 것으로 성적인 경험이 있다. 성적인 극치감은 황홀경에 의해 유발되거나 어떤 마약의 효과로 생겨나는 것과 유사한 상태를 자아낸다. 집단으로 행해지는 성적인 의식은 이러한 원시적인 의식의 한 부분이었다. 황홀경을 경험한 후, 얼마간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통받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안에 대한 긴장은 점차 고조되며, 다시 그 의식을 되풀이해야만 감소되는 것이다.
황홀경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그 강도가 매우 강렬하여 때로는 난폭하다는 것이며, 둘째로 전인격에 걸쳐서, 즉 육체와 정신 모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며, 셋째는 일시적이며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가장 흔하게 선택되어지는 일치의 양식이다. 그것은 집단, 그 집단의 관습, 관행, 신념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상당한 발전을 볼 수 있다.
합일을 얻는 방법 중 하나는 ‘창조적인 활동’이다. 비록 그것이 예술가의 활동이든 숙련된 장인의 활동이든 어떤 종류의 창조적 활동이든 간에 창조적인 사람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나타내는 자료와 결합한다. 목수가 탁자를 만들든 금세공인이 보석을 다듬든 농부가 곡식을 재배하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든 간에,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인간은 창조과정에서 자신을 세계와 결합한다.
생산적인 작업에서 이루어진 합일은 인간 상호간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황홀경 속에서 이루어진 합일은 일시적이며 일치에 의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해답에 불과하다. 완전한 해답은 인간 상호간의 합일과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의 성취인 것이다.
‘공서적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와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둘이지만 하나이다. 어머니와 태아는 공서, 즉 함께 살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일부이고 필요한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서 받는다. 어머니는 태아의 세계인 것이다. 어머니는 태아를 먹이고 보호하지만 어머니 자신의 생명도 타아에 의해서 강화된다. ‘정신적’인 공서적 합일에 있어서의 두 신체는 독립적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애착이 존재한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인 유형은 복종, 또는 임상적인 용어로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며 보호해 주는 타인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기디 힘든 고독감과 분리감으로부터 도피한다. 인간의 복종하고 있는 사람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간에 팽창된다. 그는 모든 것이며 내가 그의 일부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 나는 위대성과 확실성의 일부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할 필요도, 위험을 무릅써야 할 필요도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다. 하지만 독립한 상태도 아니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하며 아직 완전히 탄생한 것도 아니다.
공서적 융합의 ‘능동적’인 형태는 지배 또는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하는 심리학적 용어로는 ‘가학성 음란증(사디즘, sadism)’이다. 가 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타인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고독감과 갇혀 있다는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에 의존하듯,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적인 사람에게 의존한다. 양자는 한쪽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차이점은 오직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하고 착취하며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하지만,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받고 착취당하며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의미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좀더 깊은 감정적인 차원에서 그 차이는 양자가 공유하는 것, 즉 통합성이 없는 융합만큼 그리 크지 않다. 만일 이 점을 이해한다면 일반적으로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방식과 피학대 음란증적 방식의 두 가지에 의해 서로 다른 대상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공서적 합일과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즉 인간이 타인과 분리되는 벽을 허물어 버리고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독감과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며 동시에 각자에게 자신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한편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세계와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것 외에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 없이 그냥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사람은 ‘수동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그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집중적 명상은 최고의 활동이며 내적 자유와 독립의 상황에서만 행할 수 있는 영혼의 활동이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능동적인 감정과 수동적인 감정, 즉 ‘행위’와 ‘열정’으로 구분한다. 능동적인 감정을 행사하는 인간은 자유롭고 자신의 감정을 지배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감정이 나타날 때 인간은 충동을 느끼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동기에 좌우되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덕과 힘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명제에 도달한다.
시기와 질투와 야망 등 모든 종류의 욕심은 열정이다. 하지만 사랑은 행위이며 오직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해질 수 있고 억압의 결과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인간의 힘의 행사이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인 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말로 표현 할 수 있다.
주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애매하고 복잡한 것이다. 가장 널리 퍼저 있는 잘못된 생각은, 주는 것이란 뭔가를 포기하는 것과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저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단계를 넘어설 만큼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준다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의 성격은 오직 받는 것에 대한 교환으로서만 주려고한다. 그에게 있어서 받지 않고 주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은 준다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주기를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규범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보다 박탈당하는 것을 참아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은 주는 것에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나는 나의 힘과 부와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는 것은 나를 환희로 가득 채워준다. 나는 자신을,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왜냐하면 주는 것은 박탈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서 나의 생동감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몇 가지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켜 보면 이 원리가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예를 성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남성의 성기능의 절정은 주는데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을, 자신의 성기를 준다. 극치감을 느끼는 순간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정액을 준다. 만일 그가 능력이 있다면 정액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줄 수 없다면 그는 성적 불능자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그 과정은 좀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리 다르진 않다. 여자 역시 자기 자신을 준다. 여자는 자기 중심을 향해 문을 연다. 여자는 받는 행위를 통해 주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이러한 주는 행위를 할 수 없고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주는 행위는 애인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기능에서 다시 나타난다. 어머니는 자신의 안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자신을 주며 유아에게 젖을 먹이고 체온을 준다. 주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주는 것은 곧 부유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 부자이다. 어떤 것을 잃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가 얼마나 많이 가졌든 간에 가난한 사람이며, 가난해진 사람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하다. 그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오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필수품마저도 상실한 사람만이 물질적인 것을 주는 행위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경험으로 보면 사람이 최소한의 필수품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가 실제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더 잘 주려고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일정한 수준을 넘어선 가난은 주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 가난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주는 기쁨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면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과 그가 지닌 것 중에 가장 귀중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준다. 물론 이 말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을 준다. 이것들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의 표현이며 명시이다. 따라서 그는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부유하게 하며, 자신의 생동감을 강화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강화한다.
그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기쁨이다. 하지만 주는 것을 통해서 그는 타인의 삶에 뭔가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렇게 가져온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진실로 주게 될 때 그는 그에게 되돌아 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는 것은 타인을 역시 주는 사람으로 만들며, 그들은 서로의 삶에 가져온 것을 함께 즐기게 된다. 주는 행위 속에서 뭔가 탄생하며 관계된 두 사람은 새로 태어난 생명에 감사하게 된다. 특히 이를 사랑과 관련지어 보면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무능력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사랑으로써만, 신뢰를 신뢰로써만 바꾸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술을 즐기려 한다면 예술적으로 훈련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타인에 대해 진실로 자극을 주고 발전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진실되고 개인적인 삶의 명확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즉 사랑을 낳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능력이요 불행을 의미한다.
책임은 사랑의 세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쉽게 지배와 소유로 전락할 수 있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경외는 아니다. 존경이란 어원과 관련지어 볼 때,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과 그의 독특한 개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존경은 타인이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며, 착취가 없는 상태이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와 일체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목적을 위한 대상으로서 필요로 하는 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감을 느낄 것이다. 존경은 내가 독립성을 획득한 경우에만, 즉 내가 꼿꼿이 서서 목발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 착취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그를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으면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유발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지식에도 많은 층이 있다. 사랑의 한 측면이 되는 지식은 주변에 머무르지 않고 중심을 꿰뚫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내가 나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을 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현실을 보기 위해서,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이나 비이성적으로 왜곡된 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야한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의 궁극적인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다. 이 네가지는 성숙한 인간, 즉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계발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갖고자 하며, 전지 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망상을 포기하고, 오직 생산적인 활동만이 제공할 수 있는 내적인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깨우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2.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유아적인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원칙에 따른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라는 원칙에 따른다. 미성숙한 사랑은 ‘나는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모성애는 그 성격상 무조건적이다. 어머니는 갓난아이가 어떤 특별한 조건을 채워 주어서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기대에 따라 성장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린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에 상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남게 되며,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항상 있다. 게다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상대방을 즐겁게 해 주었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결국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씁쓸한 감정을 흔히 남긴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모성애를 매우 동경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다르다. 어머니는 우리가 생겨난 고향이고 자연이며, 땅이요 바다이다. 반면에 아버지는 그러한 자연적인 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생후 몇 년간은 어린애와 거의 밀접한 관계가 없으며, 이 기간에 있어서 어린애에 대한 아버지의 중요성은 어머니와 비교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연적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더라도 인간 존재의 다른 극, 즉 사상과 인간이 만든 사물, 질서와 훈련, 여행과 모험의 세계를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이를 가르치고 아이에게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기능은 사회, 경제적 발달과 관련된 기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유 재산이 생겨나고, 그 사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게 될 때,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아들을 찾기 시작한다. 자연적으로 자신의 계승자가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상속자는 그를 가장 많이 닮고 결과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이 원칙은 ‘너는 내 기대를 충족시키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널 사랑한다’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생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하며, 지나치게 불안해서도 안 되고 어린이에게 자신의 불안을 심어 주어서도 안 된다. 어머니의 삶의 일부는 아이가 독립적이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희망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그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라기 보다는 인내심이 많고 관용적이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라는 어린이에게 점증하는 능력감을 심어 주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권위가 되도록 아버지의 권위 없이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성인이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단계에까지 이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성숙한 인간은 어머니다운 양심과 아버지다운 양심을 지니고 있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떤 못된 행동이나 범죄도 나의 너에 대한 사랑과 네 인생의 행복을 바라는 내 소망을 빼앗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아버지다운 양심은 “너는 잘못햇다. 넌 네실수의 결과를 인정해야만 한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되길 바란다면 넌 네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성숙한 인간은 외부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며, 자기 내부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형성한 사람이다. 어머니 중심의 애착에서 아버지 중심의 애착으로 발달하는 과정속에, 그리고 양자가 궁극적인 종합을 이루는 과정 속에는 정신 건강의 바탕과 성숙의 성취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발달의 실패는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이 흐름의 사상을 좀더 깊이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간단히 몇 가지를 언급하면 그 말의 뜻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신경증이 생기는 한 가지 원인은 어떤 소년이 애정은 있지만 지나치게 방임하거나 간섭하는 어머니와 약하고 무관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경우 그는 초기의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 머물러 있으며,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무기력하며 수용적인 인간, 즉 받기를 좋아하고 보호받고 보살핌을 받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버지다운 자질, 즉 훈련과 독립, 그리고 자신이 삶을 주도하는 능력이 결핍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 하는데 떄로는 여자에게서, 때로는 권위와 힘의 영역에 있는 남자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한다.
반면에 어머니가 냉정하고 무관심하거나 지나치게 간섭한다면 그는 어머니의 보호에 대한 욕구를 아버지에게, 결과적으로 아버지상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또한 그는 일방적으로 아버지 지향적인 인간, 즉 법과 질서, 그리고 권위의 원리에 충실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인간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러한 발달은 아버지가 권위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아들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강화된다.
3. 사랑의 대상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즉 ‘성격의 방향’이다. 만일 어떤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결국 사랑받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강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것과 똑같은 오류이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야 할 것은 올바른 대상이 전부이며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이 그 기술은 배우지도 않고 단지 적당한 대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찾게 되면 멋지게 그리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에 비유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 이 세계를 사랑하고 나 자신까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 형제애
모든 유형의 사랑에 있어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사랑은 형제애이다. 형제애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감, 보호, 존경, 지식과 더불어 그의 삶을 심화시키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형태의 사랑이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서, 배타성이 전혀 없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진다. 만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켜 왔다면, 나는 내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형제애를 통해 모든 인간과의 결합과 인간적 유대의 경험이 가능해진다. 형제애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재능이나 지능, 지식의 차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인간적 내면의 동일성에 비하면 매우 하찮은 것이다.
2) 모성애
모성애는 어린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정의에 대해 중요한 것을 한가지 덧붙여야겠다. 어린이의 삶에 대한 긍정에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어린이의 생명 유지와 성장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호와 책임이며, 다른 하나는 단순한 보존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는,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것이 좋고 어린 소년 혹은 소녀라는 사실과 이 지상에 있다는 것이 좋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태도이다.
구약성서에서 약속된 땅(땅은 항상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젖은 모성애의 첫 번째 측면, 즉 보호와 긍정의 상징이다. 꿀은 생명의 달콤함, 생명에 대한 사랑과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젖을 줄 수 있지만, 오직 소수만이 꿀도 줄 수 있다. 꿀을 주기 위해서 어머니는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며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어린이에 대한 영향은 거의 과장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감염된다.
이 두가지 태도는 어린이의 전인격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사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젖’만 받은 사람과 ‘젖과 꿀’을 받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
어린애는 자라게 마련이다. 어린애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어머니의 젖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결국 완전하게 분리된 인간 존재가 된다. 모성애의 주요 본질은 자라는 어린애를 보살핀다는 것이며, 그것은 어린애를 어머니에게서 분리시키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성애와 근본적 차이를 나타낸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사람이 하나가 된다. 모성애에서는 하나였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어머니는 참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분리를 도와 주어야 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지극히 어려운 것이 되며 비이기성, 즉 모든 것을 주고 사랑받는 아이의 행복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자아 도취적이며 지배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여자는 어린애가 어릴때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딜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진실로 사랑을 주는 여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보감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확고시 서 있는 여자만이 분리의 과정을 밟고 있는 어린애에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3) 성애
모성애와 형제애 형태의 사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성애’인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융합, 즉 다른 한 사람과의 결합을 갈망하는 것이다. 친밀성은 기본적으로 성적인 접촉을 통해 형성된다. 사람들은 우선 물리적으로 분리된 것으로써 타인의 분리를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 결합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분리의 극복을 나타내는 다른 요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 자신의 희망 및 불안에 대해 말하는 것, 자신의 순진한 면 혹은 유치한 면을 보여주는 것, 세계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형성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신의 분노, 증오, 자제심의 완전한 결여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친밀함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변태적인 매력을 설명해 주는데, 그 부부는 잠자리에 같이 있거나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분노를 터뜨릴 때만 친밀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친밀감은 모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축소된다. 그 결과는 새로운 사람, 즉 새로운 낯선 사람과의 사랑을 찾는 것이다. 다시 낯선 사람이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흥겹고 강렬해지며, 다시 점차 그 강렬함이 누그러져 새로운 사랑은 이전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에 젖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는 희망으로 끝난다. 이러한 환상은 성욕의 기만적 성격에 의해 크게 조장된다.
성욕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 속에서 사랑이라는 생각과 짝을 짓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육체적으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사랑은 성적인 일치를 향한 욕구를 고양시킬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있어 육체적인 관계에는 탐욕과 정복하거나 정복당하고 싶은욕구는 존재하지 않고 부드러움이 결합되어 있다.
4) 자기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해는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진실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며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포함한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생겨나는 ‘감정’ 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한 사랑받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능동적으로 갈망하는 것이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하기는커녕 정반대 되는 거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매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자신을 증오한다.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호감과 보살핌의 부족은 그의 생산성 부족의 한 가지 표현에 불과하며 자신을 공허하고 좌절된 상태로 남겨둔다.
이기적인 사람은 타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그 사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처럼 자아 도취적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이기적인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다.
‘비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살며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하며, 자신의 비이기심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다는 사실을알고 의아해 한다. 분석적 연구를 보면 그의 비이기심은 그가 지닌 다른 증상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들 중의 하나이며 오히려 가장 중요한 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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